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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홀로 있음: Aloneness - 오쇼 라즈니쉬

노아 리 2011. 10. 21. 20:57

 

홀로 있음: Aloneness

 

홀로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또한 사랑에 빠진다는 것, 즉 타인과 함께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이 둘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 관계에 있다. 그대가 타인과 즐기고 있을 때는 그냥 즐겨라. 완벽하게 즐겨라. 그때는 홀로 있음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타인들에게 신물이 났을 때는 홀로 있음 속으로 옮겨 가서 그 고독을 완벽하게 즐겨라.

선택하려고 하지 말라. 선택하려고 애쓴다면 난간에 봉착할 것이다. 일체의 선택은 그대 속에 분리, 즉 일종의 단편적인 조각을 낳을 것이다. 왜 선택하는가? 둘 다 갖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과정이다. 마치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그대는 그만 먹는다.

사랑과 홀로 있음에 관해서도 진실은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즐겨라. 그들도 신성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면이 있다는 것도 명심하라. 그대가 신물나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사람들과 관계할 필요가 없으며, 예절과 격식에서 벗어나 그저 정직해져라! 영국 신사인 척하지 말라. 물론 신사인 척 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항상 공손하라거나 매너와 에티켓을 지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싫증이 났는데도 그대는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데도 그대는 “만나서 기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왜 그대는 자신의 내면 속에 그 같은 이상한 흠(틈)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가? 이제는 때가 왔다. 이제는 정직해야 할 때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호감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하라. 그리고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단지 “미안합니다만“이라고 말하라. 무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억지로 대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저 이렇게 말하라.

“난 홀로 있고 싶어요. 난 나 자신의 공간을 갖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완전히 난센스이자 비인간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진지해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표징이다. 그대는 이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남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두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있기로 했다면 그건 좋은 일,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홀로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홀로 있음은 그대에게 평화, 침묵, 평정심, 명상적인 마음, 각성을 주며 아울러 성실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뿌리 박혀 있고 든든히 자리잡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위대한 가치들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비와 기도와 봉사를 배우는 데 도움을 주며 서로를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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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은 한송이 꽃, 그대 가슴 속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이다. 홀로 있음은 긍정적이며, 홀로 있음은 건강하다. 그건 존재 자체의 기쁨이다. 그건 자신의 공간을 갖는 것에 대한 기쁨이다.

그렇다. 그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홀로 있음을 느낀다. 홀로 있음은 아름다우며, 홀로 있음은 축복이다. 하지만 사랑만이 그걸 느낄 수 있다.왜냐하면 사랑만이 그대에게 홀로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더 이상 타인이 필요하지 않도록 그대를 깊이 채워준다. 그대는 홀로 있을 수 있다. 사랑은 그대를 온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대는 홀로 있으면서도 열락(悅樂)의 경지에 빠질 수 있다. 사랑과 홀로 있음은 동일한 에너지의 양극이다……

따라서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홀로 있으려는 커다란 욕구가 일어난다. 명심하라. ‘오직’ 사랑에 빠져 있을 때만 홀로 있으려는 커다란 욕구가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연인들은 상대에게 홀로 있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들은 금방 에너지로 가득 차며, 그들은 함께하면서 그 에너지로 서로를 씻어준다. 홀로 있을 때는 나누기 위한 커다란 욕망이 일어난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홀로 있고 싶고, 홀로 있을 때는 금방 사랑에 빠지고 싶은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 여기에 바로 리듬이 있다. 멀어지는 것이 사랑에 반(反)하는 것은 아니다. 멀어지는 것은 홀로 있음(그 아름다움과 기쁨)을 스스럼없이 다시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때마다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본능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이 일어난다. 어느 누구도 기쁨을 억제할 수는 없다. 억제될 수 있는 기쁨은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다. 기쁨은 그대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대는 그 기쁨을 억제할 수 없다. 기쁨은 넘쳐흐르는 홍수이다! 그대는 그 기쁨을 나눌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일이 붓다에게서는 더 높은 수준으로 일어났다. 붓다가 깨달았을 때 그는 에너지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을 나누어야 했다. 42년 동안 붓다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기쁨을 나누었다.

넘치는 풍요로부터 나눔이 일어난다. 그리고 깨달음, 불성(佛性), 그리스도 의식은 그대를 신성과 연결시켜준다. 에너지의 무한한 원천을 그대는 쓸 수 있게 된다. 마르지 않는 원천이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나눌 수 있으니,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이 계속 그대에게 온다.

홀로 있음은 자신의 궁극적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해준다. 스승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홀로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연인이다. 그대는 붓다나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한 연인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즘의 사랑은 너무나 질적으로 달라져 있다. 우정과 자비와 공감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열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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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결코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이다. 사람들 속에 있는 뭔가 본능적인 것이 이렇게 속삭인다.

“그곳으로 들어가지 말라. 그곳은 위험하다. 그대는 완전히 홀로 있을 것이다. 설사 큰소리로 외친다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욱더 홀로 있게 된다. 그대가 존재의 근원에 도달할 때, 홀로 있음은 절대적이며 침묵은 영원하다. 어떤 움직임도 없다.

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외부 세계로 치달리면서 이런저런 일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홀로 있을 수 없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워낙 피상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를 하나의 존재로 일컫는 것은 낱말의 오용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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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법을 배울 때에만 성취할 수 있는 보다 고차원적인 축복이 있다. 그 축복은 그대의 존재로부터 일어난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분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축복은 부단한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대는 그 축복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다. 내면의 탐구는 바로 이 축복을 위한 것이다.

홀로 있음 속의 축복, 이것이 명상의 의미다. 홀로 있음 속의 축복이 가능할 때, 그리하여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도 의지하지 않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살아 있다. 그리고 홀로 있음 속의 축복은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아침이든 저녁이든, 낮이든 밤이든, 젊음 속에서든 늙음 속에서든, 건강 속에서든 질병 속에서든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 삶에서나 죽음에서나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분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리고 자성(自性, 자기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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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여행은 절대 고독을 향한 여행이라서 어느 누구도 그대와 함께 할 수 없다. 어느 누구와도 그대의 중심을 나눌 수 없으니, 심지어 그대의 연인과도 나눌 수 없다. 그대의 중심은 사물의 본성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도 행해질 수 없다. 그대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 세계로 이어지는 일체의 연결이 파괴된다. 일체의 다리가 파괴되는 것이다. 실제로 온 세상이 사라진다.

따라서 신비가들이 세상을 환상, 즉 마야(maya)라고 부른 이유이다. 환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상가, 즉 내면으로 들어간 사람에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침묵은 너무나 심오해서 어떤 소음도 그 침묵을 꿰뚫지는 못한다. 홀로 있음은 너무나 깊어서 끈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홀로 있음으로부터 축복이 폭발한다. 이것이 신성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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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 그 순수한 공간을 축복하라. 위대한 노래가 그대 가슴 속에 일어날 것이다. 그 노래는 각성의 노래이자 명상의 노래이다. 그 노래는 멀리서 부르는 홀로 있는 새의 노래이리라. 특별히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르는 것이다. 가슴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부르고 싶은 것이며, 구름이 잔뜩 머금었기 때문에 비를 내리고 싶은 것이며, 꽃봉오리가 충만해 있기 때문에 꽃잎이 열리면서 향기를 발산하는 것이다. 거기엔 특별한 수신자가 없다. 그대의 홀로 있음이 춤이 되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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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과 침묵은 동일한 체험의 갈래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침묵을 체험하고 싶다면, 온전한 홀로 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침묵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 이 두 가지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수천가지의 환상을 창조해낸다. 다양한 인간관계, 친구와 적,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민족과 종족과 종교 등등, 우리는 하나의 사실, 우리가 홀로라는 사실을 피하기 위해 온갖 망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진실은 바뀔 수 없는 법이다. 홀로 있음으로부터 도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누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대 홀로 있음을 기꺼이 누리는 것이 바로 명상의 모든 것이다. 명상가는 자신의 홀로 있음 속으로 깊이 뛰어드는 자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홀로 태어나고, 죽을 때도 홀로 죽으며, 따라서 깊숙한 근거에서는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홀로 있음이 무엇인지 왜 체험하지 않겠는가? 홀로 있음은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인 것을!

 

 

피아졸라 리베르탱고

Astor Pantaleon Piazzolla, 1921 - 1992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가든파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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